■ 기사 타이틀 : “80살 넘도록 까막눈...이젠 지하철역도 읽어요” 학생들 붐비는 ‘태청야학’
■ 기사 일시 : 2023.05.21 06:00
■ 기사 내용
17일 서울 중랑구 소재 태청야학에서 만난 배은순(83)씨가 통학길에 타는 지하철 7호선 역 이름을 하나씩 읽어 보이면서 환하게 웃었다. 3개월째 야학에서 한글을 배우는 그는 낮엔 손주를 보다가 오후 7시부터 매일 2시간씩 수업을 듣는다. 그는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여자는 밖으로 내돌리면 소리난다고 해서 학교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라며 “내내 동생들 돌보고 일했다”라고 말했다. 1974년 개교한 태청야학은 곧 개교 50주년을 맞는다. 지하철 7호선 먹골역 인근의 작은 상가 2층에서 60~80대 학생 30명이 수업을 받는다. 교사들은 대부분 학생의 손자 뻘인 20~30대인데, 야학 학생에서 교사가 된 경우도 있다. 수업시간은 매일 평일 오후 7~9시. 2교시로 나눠 쓰기와 읽기 등 성인기초문해교육을 중심으로 글쓰기, 맞춤법, 국어, 수학, 영어, 사회 등의 수업이 진행된다. 교사마다 주 1~2회씩 담당하는 과목을 가르친다. 수업 난이도별로 소망, 배움, 지혜, 심화반이 있다.
이날 저녁 7시쯤 기자가 찾은 태청야학 교실에서는 곱슬머리 파마를 한 노년의 학생들이 수학 자릿수 맞추기 수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두 자릿수 뺄셈 문제를 풀던 양모연(79)씨는 “숫자를 세고 읽는 것도 몰라서 창피했는데 이제야 재밌게 배운다”며 “은행에서 이름을 못써 가만히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이 예전의 자신 같아 대신 이름을 적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번 학기부터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을 위해 ‘스마트폰’ 수업이 신규 정규 수업으로 편성됐다. 스마트폰 수업을 하는 김윤성(34) 교무부장은 “‘앱’과 같은 외래어나 ‘터치’ 등 외국어도 알려드리고 문자를 작성하는 연습도 한다”며 “어르신들이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을 쓰며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음 달부터는 매장에 비치돼 있는 키오스크를 야학에 들여와 직접 이용해보는 교육도 진행한다.
◇ “3수 만에 초졸 검정고시 합격...교복 입고 소풍, 너무 좋아”
태청야학은 어르신들에게 배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2년째 매일 출석하고 있는 최예순(69)씨는 요즘 인생을 새로 사는 기분이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수십년 전 잠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1학년 1학기도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나와야 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 탓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당시 담임교사에게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은 게 학교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8살부터 일을 시작해 벽돌 나르기부터 도색공장 미싱공장 등을 전전한 그는 요즘엔 마트에서 직원들의 식사를 만드는 일을 마치고 저녁마다 야학을 찾는다. 지난해 4월엔 3수만에 초졸 검정고시 시험에 합격했다. 2018년 동기들과 갔던 설악산 소풍을 회상하며 “8살부터 밥 해먹고 일하면서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다”며 “야학에서 설악산 소풍을 가서 교복을 입어보니까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윗옷 카라를 만졌다”고 했다. 이곳 늦깎이 학생들은 각자의 두터운 인생사 만큼이나 배움에도 열정적이다. 그간 한글이나 숫자 셈을 알지 못해 쌓였던 한을 풀 수 있어서다. 무지로 인한 두려움이 용기로 뒤바뀌어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주위 노인들에 직접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는 것도 보람차다고 한다.
◇ “교사들은 얕은 지식 전달하지만 어른들은 70년 삶의 지혜 가르쳐줘”
20년간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다 오는 7월 퇴직을 앞두고 야학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소경수(43)씨는 야학을 ‘작은 사회’라고 표현했다. 소씨는 “우리 교사들은 얕은 지식을 전달하지만, 학생분들은 70여년간 얻은 삶의 지혜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교지편집부에 소속된 소씨는 학생들의 그림일기를 보며 모든 학생들이 각자 살아온 얘기를 담은 책을 엮어 내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태청야학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기며 학생 수가 절반 이상 줄었다. 대부분 입소문을 통해 이곳을 찾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홍보를 하기가 어렵다. 야학의 지속 방안도 고민 거리다. 이곳의 학비는 무료로 교사들이 내는 월 1만원의 회비로 운영되어 사정이 빠듯하다. 야학 운영에는 다달이 250만원, 연간 약 3000만원의 운영비가 들어 후원의 밤 등 행사를 열어 도움을 받기도 한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지난 2020년 발표한 기본적인 읽기·쓰기·셈하기가 불가능한 성인 비문해자는 200만명이다. 올해 교육부가 발표한 2023년 성인 문해교육 지원 사업 기본계획에 따르면 평생교육시설·야학 등 문해교육기관에 성인 문해교육 프로그램 운영비 41억5000만원이 지원된다. 전국의 1500개가 넘는 기관이 나눠 갖는 방식이라 턱없이 빠듯하다. 태청야학 관계자는 “이곳 교사들은 한 학기에 한 번씩 모여 1박 2일 동안 자유롭게 무제한 토론을 한다. 그만큼 야학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며 “야학이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이 늘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 기사 원문 : https://biz.chosun.com/topics/topics_social/2023/05/21/EGZJZ2PK7VDDVAO5LDD5HVHOK4/
■ 기사 타이틀 : “80살 넘도록 까막눈...이젠 지하철역도 읽어요” 학생들 붐비는 ‘태청야학’
■ 기사 일시 : 2023.05.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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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울 중랑구 소재 태청야학에서 만난 배은순(83)씨가 통학길에 타는 지하철 7호선 역 이름을 하나씩 읽어 보이면서 환하게 웃었다. 3개월째 야학에서 한글을 배우는 그는 낮엔 손주를 보다가 오후 7시부터 매일 2시간씩 수업을 듣는다. 그는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여자는 밖으로 내돌리면 소리난다고 해서 학교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라며 “내내 동생들 돌보고 일했다”라고 말했다. 1974년 개교한 태청야학은 곧 개교 50주년을 맞는다. 지하철 7호선 먹골역 인근의 작은 상가 2층에서 60~80대 학생 30명이 수업을 받는다. 교사들은 대부분 학생의 손자 뻘인 20~30대인데, 야학 학생에서 교사가 된 경우도 있다. 수업시간은 매일 평일 오후 7~9시. 2교시로 나눠 쓰기와 읽기 등 성인기초문해교육을 중심으로 글쓰기, 맞춤법, 국어, 수학, 영어, 사회 등의 수업이 진행된다. 교사마다 주 1~2회씩 담당하는 과목을 가르친다. 수업 난이도별로 소망, 배움, 지혜, 심화반이 있다.
이날 저녁 7시쯤 기자가 찾은 태청야학 교실에서는 곱슬머리 파마를 한 노년의 학생들이 수학 자릿수 맞추기 수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두 자릿수 뺄셈 문제를 풀던 양모연(79)씨는 “숫자를 세고 읽는 것도 몰라서 창피했는데 이제야 재밌게 배운다”며 “은행에서 이름을 못써 가만히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이 예전의 자신 같아 대신 이름을 적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번 학기부터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을 위해 ‘스마트폰’ 수업이 신규 정규 수업으로 편성됐다. 스마트폰 수업을 하는 김윤성(34) 교무부장은 “‘앱’과 같은 외래어나 ‘터치’ 등 외국어도 알려드리고 문자를 작성하는 연습도 한다”며 “어르신들이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을 쓰며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음 달부터는 매장에 비치돼 있는 키오스크를 야학에 들여와 직접 이용해보는 교육도 진행한다.
◇ “3수 만에 초졸 검정고시 합격...교복 입고 소풍, 너무 좋아”
태청야학은 어르신들에게 배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2년째 매일 출석하고 있는 최예순(69)씨는 요즘 인생을 새로 사는 기분이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수십년 전 잠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1학년 1학기도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나와야 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 탓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당시 담임교사에게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은 게 학교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8살부터 일을 시작해 벽돌 나르기부터 도색공장 미싱공장 등을 전전한 그는 요즘엔 마트에서 직원들의 식사를 만드는 일을 마치고 저녁마다 야학을 찾는다. 지난해 4월엔 3수만에 초졸 검정고시 시험에 합격했다. 2018년 동기들과 갔던 설악산 소풍을 회상하며 “8살부터 밥 해먹고 일하면서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다”며 “야학에서 설악산 소풍을 가서 교복을 입어보니까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윗옷 카라를 만졌다”고 했다. 이곳 늦깎이 학생들은 각자의 두터운 인생사 만큼이나 배움에도 열정적이다. 그간 한글이나 숫자 셈을 알지 못해 쌓였던 한을 풀 수 있어서다. 무지로 인한 두려움이 용기로 뒤바뀌어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주위 노인들에 직접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는 것도 보람차다고 한다.
◇ “교사들은 얕은 지식 전달하지만 어른들은 70년 삶의 지혜 가르쳐줘”
20년간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다 오는 7월 퇴직을 앞두고 야학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소경수(43)씨는 야학을 ‘작은 사회’라고 표현했다. 소씨는 “우리 교사들은 얕은 지식을 전달하지만, 학생분들은 70여년간 얻은 삶의 지혜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교지편집부에 소속된 소씨는 학생들의 그림일기를 보며 모든 학생들이 각자 살아온 얘기를 담은 책을 엮어 내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태청야학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기며 학생 수가 절반 이상 줄었다. 대부분 입소문을 통해 이곳을 찾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홍보를 하기가 어렵다. 야학의 지속 방안도 고민 거리다. 이곳의 학비는 무료로 교사들이 내는 월 1만원의 회비로 운영되어 사정이 빠듯하다. 야학 운영에는 다달이 250만원, 연간 약 3000만원의 운영비가 들어 후원의 밤 등 행사를 열어 도움을 받기도 한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지난 2020년 발표한 기본적인 읽기·쓰기·셈하기가 불가능한 성인 비문해자는 200만명이다. 올해 교육부가 발표한 2023년 성인 문해교육 지원 사업 기본계획에 따르면 평생교육시설·야학 등 문해교육기관에 성인 문해교육 프로그램 운영비 41억5000만원이 지원된다. 전국의 1500개가 넘는 기관이 나눠 갖는 방식이라 턱없이 빠듯하다. 태청야학 관계자는 “이곳 교사들은 한 학기에 한 번씩 모여 1박 2일 동안 자유롭게 무제한 토론을 한다. 그만큼 야학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며 “야학이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이 늘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 기사 원문 : https://biz.chosun.com/topics/topics_social/2023/05/21/EGZJZ2PK7VDDVAO5LDD5HVHOK4/